컬럼 /신학논문

조용수 교수
부산대학교, B.A.
대전침례신학대학원, M. Div.
미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Ph. D. in Systematic Theology
현, 애틀랜타 Underwood University, 조직신학 교수

교회의 창조신학의 갱신 - 둘째 마당

Author
관리자
Date
2023-03-31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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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03/28/2023

 

3-3 형상인 인간

사람만이 신적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신학은 인간중심적 신학과 우주적 관점의 창조신학에서도 공히 인정된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성경가르침은 결코 소홀히 될 수 없으며 환경적 책임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사람이 창조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기사는 창세기 1장과 2장에 등장한다. 그러나 두 창조기사에는 여러 차이점이 존재한다. 

 

1) 남자와 여자의 동시 창조(1장) vs 남자의 창조에 이은 여자의 창조

2) 사람이 창조의 마지막 순간에 등장 vs 남자의 창조 이후에 동물 창조, 그리고 여자의 창조

3) 형상으로 창조와 정복사명이 부여됨  vs 형상 언급없이 신적 호흡으로 남자를 창조, 그리고 땅을 경작하고 음식을 허락한 것과 선악과를 금한 명령

4) 에덴동산(2장)

 

창 1:26-28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개역개정 창 1:26-28)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 또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시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내려주시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공동번역개정)

 

Then God said, “Let us make humankind in our image, according to our likeness; and 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birds of the air, and over the cattle, and over all the wild animals of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s upon the earth. 

So God created humankind in his image, in the image of God he created them; male and female he created them. God blessed them, and God said 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 the earth and subdue it; and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birds of the air and over every living thing that moves upon the earth.” (NRSV)

 

창 2장 20-25절: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니라”

The man gave names to all livestock and to the birds of the heavens and to every beast of the field. But for Adam there was not found a helper fit for him. So the Lord God caused a deep sleep to fall upon the man, and while he slept took one of his ribs and closed up its place with flesh. And the rib that the Lord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made[b]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Then the man said,

“This at last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she shall be called Woman, because she was taken out of Man.

Therefore a man shall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hold fast to his wife, and they shall become one flesh. And the man and his wife were both naked and were not ashamed. (ESV)

개역개정판은 히브리어 ‘에제르’(עֵזֶר)를 ‘돕는 배필’로 번역하는 데, 대다수의 영역본도 ‘돕는 자’ 번역한다. 공동번역은 ‘일을 거들 자’로 번역했는데, 하와를 아담과 같이 땅을 개간할 동업자나 동료로 이해했다. 인격적 완성을 향한 동료이든 혹은 소명받은 직업에서의 동료이든 간에 ‘에제르’가 가진 뉘앙스는 적어도 동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의 도움으로 이해되어야 마땅하다. 바울의 동료였던 바나바를 떠올린다면 아담과 하와의 관계는 동등한 위치의 서로 다른 존재라고 이해된다. 심지어 이 단어는 하나님의 백성을 돕는 야훼에게 적용되었다. 따라서 이 단어가 하위적 위치에서 돕는 조력자(assistant)란 함의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탈무드는 언어와 문맥의 함의는 제쳐놓고 가부장적이며 남성중심적(male chauvinistic)으로 해석한다. 하나님이 아담의 머리에서 하와를 만들지 않은 것은 하와가 남자의 머리가 되지 않도록 한 것이며 발(foot)에서 만들지 않은 것은 그녀가 아담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배려했으며, 갈빗대에서 만든 것은 하와가 언제나 아담의 가슴, 즉 마음에 있도록 의도했다는 것이다. 기능적 하위개념이나 신체구조의 차이를 내세우며 남성과 여성의 위계적인 관계를 의도하는 것은 유대교가 계몽주의이후의 자아중심적 사유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일단 사람간의 위계질서가 만들어지면 동물이나 자연세계를 사람, 특히 남자의 하위계로 전락시키는 것은 아주 쉽다. 노예제도 당시에 백인 농장주는 백인 부인위에, 그리고 부인은 아프리카계 이주민위에 군림하는 구조를 정당화하는 데에 성경을 사용했다. 인간을 드높여 여타의 피조물과의 차이를 극도로 강조하여 결국은 인간을 자연에서 분리시켜, 동물이나 식물, 그리고 지구와 온 우주의 자연을 지배하고 원하는 대로 마음껏 파헤칠 권한을 부여받았다고 여긴다. 그리스적 전통인 사물간의 위계질서를 남자와 여자에게 적용하고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 그리고 사회적/정치적 관계에도 적용한다. 

해석적 방식으로 보면 창 1장의 정복사상과 2장의 남여,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결부시켜 위계구조를 완성하는 길을 택한 셈이다. 그러나 정말 이런 식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 우선 1장의 인간창조에 관한 구절은 느슨한 교차대구법(chiasmus)을 적용하고 있다. 가장 우선적으로 단수인 하나님(엘로힘)이 등장하고, 곧 이어 복수형인 ‘우리’의 표현이 이어진다. 그러나 복수형인 신적 ‘우리’를 ‘만들자’(바라)라는 단수동사가 이어받는다. 도식으로 나타내면, 

 

단수(singular) 하나님  —-  복수(plural)인 우리(하나님)   —-   단수형의 ‘만들자’(바라) 

 

목적어인 인간(humankind, adam)은 단수형이지만, 연이어 남자와 여자의 복수형 인간이 등장한다. 일종의 집합명사인 인간이 개별적으로는 남자와 여자로 존재하나, 전체로서는 사람을 대표하는 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단수 인간  —   복수형인간, 남자와 여자

 

단수적(singular) 인간과 복수적 (plural) 형식의 인간이 앞의 신적 단수성과 복수성을 이어받고 있다. 신적 단수와 복수의 이어짐이 인간의 단수성과 복수성으로 다시 반복되고 인간의 단수성과 복수성이 신적 형상(imago dei), 혹은 반영(reflection)으로 그려진다. 인간은 단수이나 복수적으로 존재하며 이 둘 사이에는 존재적 조화가 있으며 이는 신적 존재의 형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신적 형상은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유비로 이해될 수 있다. 칼 바르트는 아담과 하와가 마주 보는 존재, 즉 나와 당신(I-Thou)의 상호적 관계를 형성하여 이것이 신적 형상이라는 견해를 펼쳤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마주보는 동등한 존재라면, 남자는 여자가 아니며 여자는 남자가 아니면서도 서로를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바르트는 이 구절을 근거로 신적 삼위일체와 사람간의 대칭되는 유사성(analogia relationis)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마주봄, 즉 동등함의 타당성 여부를 떠나, 이 대구반복은 형상인 인간을 이해하는 단서를 제공한다. 분명, 하나님은 타자(Other)이시나 전적인 타자는 아니시다. 만일 그러하면,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소멸되며, 오로지 신적 번쩍임(spark)에 의해 인간이 신적인 충만함(pleroma)에 대한 향수를 찾게 되는 영지주의적 발상밖에는 없다. 성경에 의하면 인간은  유비적으로 자신의 존재안에서 그리고 땅에 충만함(재현)으로서 신적 본질을 동료인 인간에게, 그리고 모든 피조물에게 재현한다.(represent) 

 

신적 담지자인 동시에 신적 재현의 역동성은 창 2장에서 드러난다. 하와가 만들어진 직후에 그녀를 본 아담은 “뼈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요”라고 탄성을 질렀다. 아담은 타자인 하와에게서 자신을 보았다. 내 안에 있는 타자를 내적 응시라는 나르시스적 방식으로 보면 나는 언제나 모호하고 오리무중한 존재가 된다. 상대를 자신의 소유나 하위적 존재로 여기는 한 그(그녀)의 정체성은 숨겨진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타자, 즉 당신으로서 바라보면 나의 정체성은 드러난다. 아담은 타자인 하와를 당신으로 보기 위해 자신의 존재 밖인 하와에게로 갔으며, 하와에게서 뜻밖의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존재 내부로 들어가면 자신을 잃으나 존재외부에 있는 상대자에게 나아가면, 자신을 찾는다. 정체성은 내적 고찰이나 응시가 아니라 타자와의 참 만남에서 형성된다. 나는 곧 타자를 필요로 하고, 타자에게서 나를 본다. 역사를 아는 것은 곧 자신을 아는 것이라는 말처럼, 타자를 아는 것은 곧 나를 아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이 돕는 사람으로 만든 타자 안에서 발견된다. 타자 없이 나는 곧 존재가 아니다. 남자와 여자는 상호적이며(reciprocal)이며 상호의존적(interdependent) 존재이다. 신적 형상의 담지자로서 하와는 아담을, 아담은 하와를 그리며, 상대의 부재는 정체성에 대한 갈구를 더 강렬하게 만들고, 정체성을 찾기위해 상대에게로 나아가서 결국은 자신에게로 연합한다. 우정과 사랑은 모두 자신 밖으로 나아가는 행위이며, 이로서 신적 형상은 찾고 찾아짐과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순환을 지속한다. 오직 동등하지만 고유한 존재로서 마주 설때 인간은 일시적 분리를 극복하고 마침내 자신에게로 통합된다. 신적 형상은 동등한 존재로서 또 하나의 나를 찾고 발견하도록 하며, 그러한 방식과 맥락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유비적으로 대표할 수 있다.(계시)

 

3-3 신적 형상, 정복, 사명 (창 3장)

창 1장과 2장을 잘 연계시키면, 신적 형상에 대해 몇 가지 단서를 얻을 수 있다. 창 1:26-28에서는 규정된 신적 형상의 특권과 정복사명이 창 1장 내에서는 실현되는 모습을 찾을 수 없다. 단지 인간은 그런 존재로 지음 받고 그런 사명을 부여받는 신적 선언을 들었을 뿐이다. 그러나 2장은 형상인 인간의 존재와 활동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먼저 아담(Adam)은 먼저 흙(Adamah, soil/earth/dust)으로 지음 받았고 그 이후에 생기를 부여받아 살아있는 존재(nephesh)가 되었다. 인간중심적 신학은 흙으로부터 지음 받음과 영을 받는 장면의 차이에 집중하여 인간이 영혼을 가진 존재이므로 타 피조물보다 탁월하며 그래서 형상이라고 본다. 

 

그러나 몰트만(Jurgen Moltmann)이 바르게 지적한 것처럼 신적 형상(imago dei)이전에 인간은 ‘세상의 형상’(imago mundi)을 소유했다. 피조물인 한 인간은 살아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흙이라는 물질적 요소로 구성되어야만 한다. 창 2장은 이런 의도를 부각시킨다. 형상인 아담 그 조차도 흙이어야만 하나의 생명이며 존재가 될 수 있다. 아담은 흙을 공유한 우주적 물질의 일부이다. 그는 탁월한 존재의 복을 아버지같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동시에 자신의 고향이며 어머니의 품같은 대지에서도 왔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과 물질세계를 찾고 그 안에서 살고 쉬고 일함으로 형상의 탁월한 복을 실현한다. 그는 흙에서 왔고 흙의 근본을 소유한 물질적 존재이다. 동시에 그의 존재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반영되어있다.(imago) 비활동적 수면시간에도 여전히 하나님이 그 안에 투영(projection)되는 형상적 존재이다. 

 

또 그는 그가 형상으로 사는 삶의 모든 적극적 활동을 통해서, 동료와 피조물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드러내는 사신(messenger)과 대사(ambassador)로서의  적극적 사명을 지녔다.(likeness) 그래서 오직 자신을 형상인 피조물로 창조하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또한 함께 만들어진 세계 안으로 들어가서 호흡하고 일하고 돌보는 정복의 사명이 있다. 현재적 누림과 활동만이 아니라 삶의 미래가 주어져있고, 정복하고 번성하고 땅끝까지 충만해야한다.

 

아담이 흙이라는 사실에서 아담과 흙의 본연적 관계가 규정된다. 하나님은 아담인 우리 존재가 바로 흙에서 노동하고 그 열매를 먹을 존재라는 점을 되새져주신다. 인간이 대지에서 노동하고 수확의 즐거움을 누리고, 땅으로서의 존재를 잃지 않으면서도 고유의 특성을 이용하여 문화를 창출하는 사명을 실현하는 것이 하나님을 대표하는 삶이다. 우리는 대지에서 태어나고 성장하고 일하며 먹으며, 대지에서 삶을 즐긴다. 아담은 흙을 벗어나서 자신의 형상과 정복을 실현할 수 없다. 형상적 존재는 땅과 결합하여 노동과 삶의 가치를 진작시키며, 땅과 평화를 이루는 문화를 만든다.  

 

2장의 흥미로운 점은 또 있다. 하나님은 아담 후에 동물을 존재케하신 다음에 아담으로 이름을 짓도록 하셨다. 이름을 짓는 행위는 창 1장의 신적 권한에 유사한 특권을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는 각도를 약간 달리해서 이 부분을 읽어본다. 아담은 각 동물의 이름을 짓기 위해서 먼저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갔으며 고유성과 특징등을 고려한 후에 이름을 지어 불렀다. 이렇게 함으로 인간과 동물 사이에 관계가 성립될 것을 암시한다. “불러주기 전에는” 단지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던” 동물의 이름을 불렀을 때, 이제는 아담에게 참새가 되고, 호랑이가 된다. 동물과의 교제는 아담에게 창조의 중대한 한 부분인 동물세계에 대해서도 그 관계성을 보여준다. 아담은 자신이 이름을 지은 동물과의 지속적 만남을 가져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서만 그는 인간 자신만의 세계가 아닌 보다 넓은 세계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창조는 이미 주어진 어떤 선험적인 것이지만, 그래서 인간이 본연의 관념으로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지만, 오히려 하나님은 인간이 참여함으로 얻는 지식(knowledge by participation) 혹은 선험에 근거한 후천적 지식 습득, 또는 존재적 경험주의(ontological empiricism)이 의도되었음을 여기서 확인한다. 

 

따라서 동물은 일종의 하위적 존재 혹은 열등한 존재로 간주되지 않고 다른 방식의 선한 동료로 여겨진다. 존재방식이나 능력의 범위, 표현양식, 물질적 형태가 사람과 달라도 동물 역시 우주적 공동체의 일원으로 간주된다. 아담의 고유성은 자신의 형상으로 동물세계와 호흡하며 공생하고 자신의 문화안에 이들의 자리를 확보해야 함을 안다. 그는 계속해서 자신과 동물 상호간의 고유성과 공통성을 알아가며, 그 지식과 관계를 발전시켜 나갈 특권과 책임을 인지한다. 그가 형상인 한 그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돌보듯이 피조물의 필요와 특성을 연구해나가고 이를 바탕으로 동물세계의 권한과 존재의 자리를 확보하는 지식을 축적한다. 그는 자신과 다른 존재와  세계의 공간과 시간을 공유해야 한다. 세계에 대한 인간의 지식과 학문, 문화는 이런 관련 속에서만 발전할 것이다. 소통하지 않는 공생(symbiosis)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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